농촌 아낙의 봄.
나는 지금 햇볕에 익어서 빛깔도 다 바래어지고 붉은 녹이 슬어서 못쓰게 된 파라솔용 탁자위에, 다리가 분질러 없어진 식탁의 뚜껑을 얹어서 하얀 망사 테이블보를 덮어 멋지게 재활용된 책상위에 앉아 창 너머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봄의 소리를 듣고 있다.
바야흐로 만물이 약동하는 봄이 되었는지 골짜기 너머에서 흙밭을 일구는 경운기의 탈탈거리는 소리와 "자라자라~" "워어워어~" 하며 구성지게 들려오는 소몰이꾼의 가락을 들으며 이젠 정말 한 겨울을 아쉽게 보내고 새로 시작된 봄이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는다.
시골로 시집온 뒤 10여 년을 살아왔건만 아직도 나는 흙을 만지는 일에 영 정이 붙지를 않아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느끼기보다는, 힘들고 괴로운 일철을 맞이 해야하는 신음부터 절로 먼저 새어 나와서 봄이 오는 소리가 영 나를 불안하게만 만든다.
겨우내 시퍼렇게 날이 선 바람에 잎을 다 떨구고 마른 뼈들처럼 앙상히 서 있는 나무를 보는 것이 슬프기는 하여도 추운날은 들판으로 나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나는 겨울을 좋아하게 되었다,
농촌은 비 오는 날이나 너무 덥거나 추운 날이 공휴일이다.
사람이 느끼는 희노애락의 감정이 저마다 비슷하기는 할테지만, 어떤 때는 내게 괴로운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될 수도 있고 , 나에게는 기쁜일이 타인에게는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봄이 다가와서 걱정되어지는 나의 마음이 어떤 이들에게는 분명 이 봄으로 인하여 희망이 솟고 꿈에 부풀어 콧노래를 흥얼거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 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하고 싶어 하는일들이 있다.
그리고 죽기보다 더 하기 싫은 일들도 있다,
어린아이의 성장과정을 통하여서 묻혀버릴 수도 있고 개발 될 수도 있는 적성이란 것이 참으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생각되어진다.
나는 가끔 어느 누구라도 어떤일을 하든지 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자유롭게 , 또한 경제적인 보장도 받으면서 열심히 살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절실히 들 때가 있다.
온통 살점을 다 태워 버릴 듯한 팔월의 오후 두 세 시 쯤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어디 의지할 그늘 한자락 없이 좁은 터널 같은 고추밭 고랑 사이에서 바람 한 점 얻지 못하고 쪼그리고 앉아 더운 숨을 훅훅 몰아쉬며 고추따기를 할 때나, 병충해 방제를 위해 그 매케한 농약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눈 앞이 어질거릴 때, 피와 땀을 다 쏟아부어 지어놓은 농작물이 휴지같은 가격으로 간장을 다 녹일 때면 흙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음이 서글프기만 하다.
팥죽 같은 땀을 쏟고 등에는 좁쌀 같은 땀띠를 긁으면서도 건너편 고랑에서 노랫소리를 흥얼거리며 재미있게 고추를 따고 계시는 시어머님을 뵐 때면 나는 가끔 경외스럽기조차 하다.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함께 흙이 되어 흙과 함께 뒹구는 일이 왜 이렇게 내게는 기쁨이 되지 못하는지 어떨 때는 죄스럽기조차 하지만 이런 감정들이 나 뿐 만은 아닌것인지 옛말에도 '남의 집 며느리 2월 밥 먹고 나면 담벼락 붙들고 운다' 는 속담이 있는걸 보면 저으기 위안도 되지만, 타고 난 숙명인 양 모심기, 밭매기, 김매기, 벼베기, 말리기 등 등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는 농작물 관리에 튼실한 일꾼으로 아무런 불평도 없이 부어오른 손목을 헝겊으로 감아매고 아픔을 진통제 알약 하나로 습관들이고, 갈라 터진 손등에 흙때를 묻혀 컴컴한 들길을 허청허청 돌아오는 이웃 아낙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작열하는 태양아래 온통 발가벗기워져서 연신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고추따기를 해야 하는 여름이 다가오는 전주곡인 봄의 움직임이 나는 두려워서 아직 늦은 봄이 되도록 농협에서 나누어준 꽃씨조차 뿌리지 못하고 있다가, 어제는 고추묘 정식을 끝냈으니 괴로운 기억마냥, 고추따기에 또 시달려야 할 여름 걱정이 스물스물 피어난다.
나이 사십을 바라보고 살아가고있는 내가 아직도 흙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얼굴을 빨갛게 달구고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볼을타고 땟국진 목 언저리로 타고 내려도 마냥 콧노래를 부르며 고추를 따고 계시는 어머님의 즐거움은 어디서 오는것일까?
서늘한 시각을 골라 효율적으로 일을하면 더 좋을 것 같은 나의 생각과는 달리 이른 새벽 이슬을 밟으며 시작한 일을 머리가 지끈 거리는 땡볕을 고스란히 받는 오후를 꼴딱 지나 어스름한 저녁이 되도록 목숨같이 일을 붙들고 계시는 우리 어머니!
한 개 한 개 따 모은 고추들이 어느 새 포대로 가득히 몇 자루나 되고 또 다시 잘 손질하여 윤기 나는 마른 고추가 된 다음, 딸네 집으로 친척 집으로 조금씩 나누어 보내고 , 5일마다 서는 장날에 이고 들고 나가셔서 꼬깃꼬깃한 지폐 몇푼으로 바꾸어 쌈짓돈을 만들곤 하는 그 재미일까?
뜨거움이 결코 뜨거움으로 느껴지지 않는 힘이란!
나도 어머님 만한 나이가 되어지면 노동의 고달픔이 저런 즐거움과 달콤한 기쁨이 되어질까?
만약 눈이 시리도록 다가오는 이 봄이 내게 기쁨이 될 수 있는날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흙이 주는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된 날일 것이다.
아직은 마당의 작은 텃밭에 상추, 쑥갓들을 손바닥 만큼만 심고 안개초 ,사루비아, 채송화, 등을 오밀조밀하게 뿌려둔 뒤 기꺼워 하는, 장난같은 노동만이 즐겁게 느껴지는 나는 비지땀을 흘리며 흙과 싸우고 타협하고 달래고 , 자신의 근본인 운명처럼 여기며 사는 진실한 농민들을 보면 진정 존경스럽다.
나의 이 철없는 투정들을 그저 꾸지람조차도 하지 않으며 무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 흙 위에, 발을 딛고 서 있음만도 부끄러울 지경인 자신을 생각하니 한심스럽기도 하여도 농사 짓기싫다고 한껏 투덜 거리는 내게 "너도 내 나이 되어봐라!" 하시던 것처럼 내 나이 어머니 만한 연륜이 될 때면 만물이 생동하는 이 봄의 소리가 살가운 흙의 교향곡으로 들려지고 고구마 모종, 가지모종, 토마토 모종을 얻으며 이 집 저 집 기웃거리게 될지........
어느 풋내 나는 농촌 아낙의 봄은 이렇게 시작되어 삶의 노래와 연륜이 되어간다.
1994년 비사벌 신문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작.